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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탐방 에세이

노들나루에서 만난 문신 박태보 조선 중종 때 문신 박태보는 진도로 귀양 길에 친구가 사는 노량진에 잠시 머문다. 그 박태보를 흠모하던 여인은 이 소식을 듣고 단 걸음에 달려 노량진의 박태보를 찾았다. 그 여인은 고문에 찢기고 터진 박태보의 장독을 다스린다. 무릎에 뉘이고 편하게 쉬게 한다. 사랑하는 여인 무릎에 누워 편하게 잠든 박태보는 끝내 깨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뜬다. 그렇게 형벌의 독 형독(刑毒)으로 운명한다. 그때의 나이 서름 여섯이었다. 박태보는 어려서부터 슬기롭고 또 얼굴이 남중일 색(男中一色)이었다. 어느 날 참판 이종염(李宗燁) 집에 심부름하는 여인 하나가 그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하여 박태보의 유모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유모가 그 사정을 딱하게 여겼으나 박태보의 심지가 곧으므로 차마 입을 열어 볼 수가 없어 그의 모친.. 더보기
새남터 노들섬 성삼문 민족의 젓줄 한가람 한강이다. 한강 노량진 나루가 있었던 곳이다. 경강(京江) 서울의 강 노량진 나루에는 경강에서 두번째로 한강대교가 놓인다. 강의 북쪽 모래벌판은 중죄인을 처형하는 새남터다. 풍수상 음습하고 나쁜 기(氣)가 서려 있는 자리이다. 경강 나루 가운데 사람들이 비교적 많이 다니는 곳이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으키기 위해 처형장을 둔 것이라고 한다. 두 아파트군(群) 사이 새남터에 순교자를 위한 새남터성당이 보인다. 사람들의 왕래가 많던 그 나루에는 예로부터 중죄인을 처형하는 한강 변 모래밭 새남터가 있었다. 두 아파트 사이 철길 옆의 한옥은 새남터성당다.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그곳에 들어선 성당이다. 수양대군은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하기로 결심하였으니 그 가장 잔인한 방법이 거열(.. 더보기
죽어서 끝까지 의(義)를 지킨 선비 사육신 조선왕조 6대 임금인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1456년 목숨을 바친 6명의 신하들의 묘역을 공원으로 조성한 사육신 공원이다. 서울시는 1978년에 사육신 충혼들을 위로하고 불굴의 충(忠) 정신을 널리 전하고자 1만 710.74m²이었던 묘역을 3만 975.21m²으로 확장해 의절사ㆍ불이문ㆍ홍살문ㆍ비각 등을 새로 지어 공원을 넓혔다. 사육신묘는 1972년 5월 25일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8호로 지정됐다. 사당 의절사로 들어가는 불이문(不二門)이다. 절에도 불이문이 있다. 그때 불이(不二)는 세속과 부처의 세계가 둘이 아니라는 뜻이다. 진리는 오직 하나이고 둘이 아니라는 의미의 불이(不二)이다. 서경의 강왕지고(康王之誥)에 불이심지신(不二心之臣)란 말이 있다. '두 마음을 갖지 않은 신하'다. 단종만이 주군.. 더보기
나랏님 피난길에 백성들이 놓은 '주억다리' 조선의 왕 인조는 백성을 버리고 황급하게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간다. 왕의 일행은 도성을 빠져나와 한강을 건너 방이(芳荑) 마을에 이른다. 백성들의 안위보다는 정파의 싸움으로 시간을 허비하였다. 광해군을 반명(反明)으로 배반하였다고 몰아낸 능양군이었다. 능양군은 친명(親明) 반청(反淸)을 내세워 쿠테타를 일으켜 왕위에 올랐다. 청나라에 대한 정보도 부족하였고 외적의 침공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끝내 청나라가 전면적인 공격으로 조선을 유린하기 시작한다. 그 왕은 가족들을 강화도로 먼저 피신시켰다. 자신은 설마하다 강화도 행의 기회를 놓치고 백성을 외면하고 나선 피난 길이다. 그래도 방이마을 백성들에게 그는 여전히 나랏님이였다. 조그만 냇가가 장애물로 인조 일행의 길을 막았다. 인근 백성들은 꾸역 꾸역 모.. 더보기
광나루와 버드나무 조선시대 서울에서 중랑천을 건너 이곳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넌 후 광주를 거쳐 남쪽 지방으로 왕래할 수 있었다. 이 나루는 강원도와 남쪽 지방으로 가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던 곳이다. 오늘날은 그 자취를 찾을 수 없으나 현재의 광진교가 놓여져 있는 한강 북쪽이다. 광진은 처음에 중급의 나루였으나 곧 승격하여 태종 때에 별감이 배치될 만큼 요충지로 발전되었다. 조선시대 한강과 남한강 및 북한강 유역을 관리하면서 수운을 담당하고 있던 곳이 좌도수참(左道水站)이며, 좌도수참의 별감이 이곳 광나루에 상주하면서 한강을 왕래하는 사람들을 기찰하고, 한강의 조운을 관장하였다. 세종 때 삼밭나루가 개설되면서 광나루의 기능이 약화되었으며, 조선후기에는 송파나루가 번성하여 광나루 - 삼밭나루 - 송파나루 순으로 .. 더보기
아차산 벌렁바위와 두꺼비탈 하늘나라 옥황상제의 시중을 드는 시녀들은 너무 아름다워서 '선녀님'이라고 부른다. 옥황상제가 은밀히 일을 보시는 일을 거드는 시녀도 있었다. 옥황상제께서는 옥으로 된 요강에 오줌을 누었다. 옥뇨(玉尿)가 보이면 황금으로 만든 오줌장군(통)에 담아서 용이 끄는 수레에 싣고서 저 멀리 은하수에 두었다. 가뭄이 드는 곳에 조금씩 뿌려주면 단비가 되어 모든 생물들이 살아난다고 한다. 어느 날 이 시녀는 옥뇨가 모인 요강을 안고 옮겼다. 옮기던 중에 잠깐 아래 나라 땅 위를 보니 금강산을 지나고 있었다. '아, 저기가 인간 세계의 신선들이 사는 곳이구나'하고 생각하니 발길이 저절로 멈췄다. 순간, 요강이 엎질러지면서 옥뇨가 쏟아졌다. 쏟아진 옥뇨는 금세 굵은 장대비가 되었다. 아예 금강산의 일만 이천의 봉우리는 .. 더보기
숯내 탄천의 전설 숯내 탄천(炭川)은 한강의 지류이다.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에서 발원하여 성남시를 거쳐 서울특별시의 강남구 삼성동과 송파구 잠실동(신천동)을 끝으로 한강으로 유입되는 총연장 35.6km의 하천이다. 남쪽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흐르는 탄천은 풍수에서 말하는 역수(逆水) 명당수이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역수(逆水) 양재천과 만나 한강으로 흘러든다. 그 곳에 옛날 옛적에 삼천갑자(三千甲子 18만년)를 산 동방삭(東方朔)이 살았다. 동방삭이 너무 오래 살아서 천상천하(天上天下)를 막론하고 큰 골칫거리 가 되었다 동방삭은 원래 30년 밖에 살지 못 하는 운명이었다. 30살이 돼서 저승에 간 동방삭은 우연히 염라대왕과 그 신하들이 졸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동방삭. 그는 저승명부에 .. 더보기
'건강하게 즐기며' 사는 낙건정 행주산성 덕양산에 충혜공 김동필(金東弼·1678∼1737)의 낙건정 정자가 있었다. 낙건정은 행주대교가 지나는 경기 고양시 덕양구 행주외동 덕양산 끝자락 절벽 위에 있던 정자다. 이조 호조 형조 공조등 6 판서를 모두 역임한 낙건정 김동필(金東弼.1678-1737)이 벼슬에서 물러나 '건강하게 즐기며' 살기위해 지은 집이다. 김동필은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1653-1722)의 문인(門人)으로 노론과 소론으로 갈릴때 비록 소론이 됐지만 스승과 벗들과의 관계 때문에 항상 노론적 성향을 잃지 않았던 인물이다. 소론의 공격으로 경종 1년(1721)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나 노론 4대신들이 처형 되고 왕세제로 있던 영조가 환관들의 모함으로 위기에 몰렸던때 과감이 나서 이들 환관을 탄핵해 영조를 위기에서 구.. 더보기
겸재 정선과 귀거래 그리고 덕양산 덕양산 기슭 행호강가에 자리한 정자 귀래정 그림이다. 정자를 세운 이는 조선시대 형조판서를 지낸 죽소 김광욱((竹所 金光煜·1580∼1656)이다. 그는 광해군 5년(1613) 폐모론이 제기되자 이를 반대하다 모친상을 핑계삼아 병조정랑의 벼슬을 버리고 행주로 물러 나와 10년간 은거해 살았다. 인조 원년(1623)에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다시 벼슬을 살면서도 늘 행주로 돌아와 지내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이에 옛날 물러나 살던 집을 고치고 그 정자에 귀래정이란 현판을 달았다. 동진(東晋)시대 대표적인 은거시인 도연명(陶淵明·365∼427)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따온 이름이다. 1742년에는 김광욱의 증손자인 동포 김시민(東圃 金時敏·1681∼1747)이 주인이 되어 서울 집을 오가며 살고 있었다... 더보기
겸재 정선의 양천팔경첩(1)개화사 겸재 정선의 양천팔경첩 가운데 그림 하나로 그림 개화사이다. 현재 서울 강서구 개화동 332의12에 있는 개화산 약사사의 모습이다. 개화산은 서울의 서쪽 끝 강서구 개화동에 위치한 표고 128.4m의 잔구성 구릉산지이다. 그야말로 동네 뒷산 수준이다. 일명 ‘주룡산(駐龍山)’이라고도 했다. 신라 때 한 도인이 주룡선생이라 자칭하며 이 산에 숨어 살면서 도를 닦고 세상에 나오지 않다가 이곳에서 늙어 죽었다. 그가 이 곳에 살 때 매년 9월 9일에는 동자 두 세명과 더불어 높은 곳에 올라가 술을 마시며 구일용산음(九日龍山飮)이라 하였으므로 주룡산이라 이름하였다고 전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그 자리에는 이상한 꽃 한송이가 피어났다. 이를 두고 사람들이 이 산을 개화산이라 일컬었다. 지금의 개화사가 주룡선생..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