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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탐방 에세이

죽어서 끝까지 의(義)를 지킨 선비 사육신

 조선왕조 6대 임금인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1456년 목숨을 바친 6명의 신하들의 묘역을 공원으로 조성한 사육신 공원이다. 서울시는 1978년에 사육신 충혼들을 위로하고 불굴의 충(忠) 정신을 널리 전하고자 1만 710.74m²이었던 묘역을 3만 975.21m²으로 확장해 의절사ㆍ불이문ㆍ홍살문ㆍ비각 등을 새로 지어 공원을 넓혔다.
사육신묘는 1972년 5월 25일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8호로 지정됐다.

사당 의절사로 들어가는 불이문(不二門)이다.
절에도 불이문이 있다. 그때 불이(不二)는 세속과 부처의 세계가 둘이 아니라는 뜻이다.
진리는 오직 하나이고 둘이 아니라는 의미의 불이(不二)이다.
서경의 강왕지고(康王之誥)에 불이심지신(不二心之臣)란 말이 있다.
'두 마음을 갖지 않은 신하'다. 단종만이 주군이라는 뜻이다.
이곳 불이문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사육신의 드높은 절개를 의미한다.

사당 의절사(義節祠)이다.
의리와 절개를 목숨과 바꾼 충신들을 모신 사당이다.

 의절사 뒤쪽 숲속의 돌계단을 오르면 사육신이 잠들어 있는 묘역이다.

 의절사 뒤로 누워있는 7인의 묘역이다.
이 묘역에는 원래 성삼문 이개 박팽년 유응부의 묘와
하위지 유성원 김문기의 가묘가 있다.
7기의 묘가 있는 이유는 <조선왕조실록>과 <추강집> 등 사료의 내용이 달라
육신에 대한 논란이 있는 뒤 김문기를 현창하고 그의 가묘도 추가했기 때문이다.
묘는 동쪽으로부터 김문기 박팽년 유응부 이개 유성원 성삼문 하위지 순서로 모셨다.

 성삼문의 묘다.
그가 태어날 때 하늘에서 " 낳았느냐? "고 세번을 묻는 소리가 들려 이름이 삼문(三問)이 되었다고 한다.

 묘비는 '成氏之墓'라고만 쓰였다.
수양군이 성삼문을 직접 심문할 때도 끝내 왕이라 부르지 않고 나으리 라고 불렀다.
수양대군이 다시 묻는다.
“ 네가 나를 나으리라고 하니 그럼 내가 준 녹봉(급여)은 왜 먹었느냐”
“상왕(단종)이 계시는데 어찌 내가 나으리의 신하인가.
당신이 준 녹은 하나도 먹지 않았으니 내 집을 수색해보라!”
성삼문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집을 수색하니 수양군이 즉위 첫날부터 받은 녹봉에
'어느 날 받은 녹'이라고 표시를 해 전부 그대로 보관돼 있었다.

그들을 '사육신'이라고 한다. 죽어서 끝까지 의(義)를 지킨 그들은 선비다운 선비였다.
조선의 선비는 벼슬길에 올라 성리학의 이념인 충(忠)을 집권자인 임금에게 다 바쳤다.
충성을 바칠만한 가치가 없는,의(義)를 저버린 임금에게는 그렇지만은 않았다.
사육신은 죽음을 통해 후세 사람들에게 의(義)를 일깨워주었다고 함석헌 선생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