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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탐방 에세이

노들나루에서 만난 문신 박태보

 

조선 중종 때 문신 박태보는 진도로 귀양 길에 친구가 사는 노량진에 잠시 머문다.
그 박태보를 흠모하던 여인은 이 소식을 듣고 단 걸음에 달려 노량진의 박태보를 찾았다.
그 여인은 고문에 찢기고 터진 박태보의 장독을 다스린다. 무릎에 뉘이고 편하게 쉬게 한다.
사랑하는 여인 무릎에 누워 편하게 잠든 박태보는 끝내 깨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뜬다.
그렇게 형벌의 독 형독(刑毒)으로 운명한다. 그때의 나이 서름 여섯이었다.
박태보는 어려서부터 슬기롭고 또 얼굴이 남중일 색(男中一色)이었다.
어느 날 참판 이종염(李宗燁) 집에 심부름하는 여인 하나가
그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하여 박태보의 유모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유모가 그 사정을 딱하게 여겼으나 박태보의 심지가 곧으므로
차마 입을 열어 볼 수가 없어 그의 모친에게 이야기를 해보았다.
그의 모친 역시 그 여인의 짝사랑을 동정하여 남편 서계공(西溪公)에게 아들을 좀 달래보라고 청하였다.
그리하여 그 부친이 박태보를 불러 여인에게 한을 남기면 앞으로의 길에 장애가 될 것이라 훈계하였으므로
박태보도 부친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 여인은 박태보의 양친을 뵙고 스스로 머리를 쪽 지어 출가한 부녀처럼 하고 다녔다.
세월은 흘러 박태보는 그 뛰어난 재주로 벼슬길에 올랐고 여인은 그의 기억에서 차츰 멀어졌다.
숙종 15년(1689) 중전에 대한 장희빈의 끈질긴 모함이 성공하여 왕이 중전을 폐비하려 하자,
직언(直言)을 잘 하던 박태보는 이 소식을 듣고 붓을 들어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진도로 귀양을 가게된다.
그러나 귀양지로 가는 길에 국문 시 입은 장독(杖毒)과 화상 (火傷)이 심해 친구 집에 있는 노량진에 머물렀다.
이때 어느 여인이 와서 박태보를 한번 뵈옵기를 청하였다.
방문객은 바로 전일에 박태보를 사모하여 혼례식도 올리지 않고 출가한 부녀자처럼 쪽을 지고 다니던 그 여인이었다.
박태보는 멀어져 가는 정신을 간신히 수습하여 겨우 손을 들어 여인의 손을 한번 꽉 잡은 다음 그만 목숨이 다했다.
여인은 그 앞에서 울고 또 울다가 일어나 나갔다.
그 후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노강서원이 완성되던 날,
그 여인은 소복을 입고 서원 뒤 서까래에 목을 매어 달아 싸늘하게 죽었다고 한다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절경을 자랑하였던 언덕에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아파트 동과 동사이로 한강이 보이고 강건너 동네 현대식 건물이 눈에 든다.
박태보가 노량진에서 형독으로 세상을 뜨자 그 한강 노들나루 근처에 그를 모시는 노강서원(鷺江書院)을 마련한다.원래 노강서원은 노량진에 있었고 1695년에 건립됐다. 1925년 큰 홍수로 한강 물이 넘치는 바람에 노강서원이 물에 떠내려갔다. 1969년 후손들이 수락산 자락에  새로 노강서원을 건립한다.
1977년에 경기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받았다.
박태보가 귀양간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거리 거리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충신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보겠다는 것이었다.
”세상에 저럴 수가!”
박태보의 짓이겨진 처참한 얼굴을 보고 사람들은 말문을 잃었다. 곳곳에서 통곡이 터져 나왔다.
남자들은 박태보의 가마를 서로 메겠다고 나섰다. 한강건너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 묘지 부근에 다다랐을 때다.
박태보는 고문으로 생긴 상처가 터져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그는 아버지 '박세당'과 아들을 불렀다.
아버지와 아들은 한동안 말 없이 눈물만 떨구고 있었다. 그러더니 박세당이 아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너는 다시 회복될 것 같지 않구나. 여기서 조용히 죽어 네 충절을 나타내는 게 옳은 일이 아니겠느냐?”
박태보의 눈에서도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버님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아버지 박세당이 울면서 한강을 건너는 것을 하염없이 지켜보던 박태보는 얼마 후 숨이 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