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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탐방 에세이

나랏님 피난길에 백성들이 놓은 '주억다리'

 

조선의 왕 인조는 백성을 버리고 황급하게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간다.
왕의 일행은 도성을 빠져나와 한강을 건너 방이(芳荑) 마을에 이른다.
백성들의 안위보다는 정파의 싸움으로 시간을 허비하였다.
광해군을 반명(反明)으로 배반하였다고 몰아낸 능양군이었다.
능양군은 친명(親明) 반청(反淸)을 내세워 쿠테타를 일으켜 왕위에 올랐다.
청나라에 대한 정보도 부족하였고 외적의 침공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끝내 청나라가 전면적인 공격으로 조선을 유린하기 시작한다.
그 왕은 가족들을 강화도로 먼저 피신시켰다.
자신은 설마하다 강화도 행의 기회를 놓치고 백성을 외면하고 나선 피난 길이다.
그래도 방이마을 백성들에게 그는 여전히 나랏님이였다.
조그만 냇가가 장애물로 인조 일행의 길을 막았다.

인근 백성들은 꾸역 꾸역 모여들었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니였다.
나랏님이 무사히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갈 수 있도록 백성들이 나선 것이다.
백성들은 그저 나랏님을 위한 충정어린 마음으로 주억돌을 주워다 징검다리를 놓았다.
그 후부터는 주억돌을 주워다 놓았다고 해서 주억다리로 불리웠다.
지하철 5호선 방이역 3번 출구 앞 대림아파트 2동 샛길 입구에 주억다리와 표시석이 있다.
인조는 이 다리를 건너 남한산성으로 피난 하였다.
청나라 군인들은 이 마을을 거쳐 남한산성으로 진격해 가려고 했다.
이 마을을 지키는 병장(방이군)들이 나섰다.
이 군인들은 산을 기어 올라오는 청병들을 향해 산위에서 활을 쏘고 돌을 마구 던졌다.
청나라 병들이 못 올라오게 막어서 결국 다른 곳으로 돌아서 남한산성으로 갔다고 한다.
오랑캐를 막았다고하여 막을 방(防) 오랑캐 이(夷) 자를 써서 방이골 이라고 불리어졌다.
1914년 쯤 마을 서당에 한학을 공부한 학자들이 마을 이름의 글자의 뜻이 아름답지 못하다고 의논한다.
막을 방(防) 자는 꽃다울 방(芳), 오랑캐 이(夷) 자는 흰비름 이(荑)로 고쳐서 방이골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 후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방이리가 되었으며, 1963년 1월1일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성동구 방이동이 되었다.왕의 피난 길을 도운 백성들의 충성심이 우러나는 방이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