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강 탐방 에세이

겸재 정선과 한강 그리고 1천원 지폐 겸재 정선(謙齋) 鄭歚1676년~1759년)은 조선 후기의 화가·문신이다. 20세에 김창집의 천거로 도화서의 화원이 됐다. 30세를 전후해 한국 산수화의 창조적 독창성이 돋보이는 진경산수화의 종화가 됐다. 금강산 등 전국을 여행하며 조선을 풍광을 화첩에 담는 작업을 꾸준히 했다. 겸재 정선은 60대 후반에 양천현령을 지냈다. 이때가 진경산수화가 완숙한 경지에 오른 무렵이다. 그는 양천현령으로 있으면서 서울과 한강을 주제로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이때 ‘경교명승첩’, ‘양천팔경첩’ 등을 남긴다. “험준하고 힘찬 산악미에다가 부드럽고 서정적인 아름다움까지 겸비했다." 겸재는 당시 강변의 풍경을 담아내면서 이같은 평을 받는다. 우리나라 지폐 천 원권 뒷면에 겸재의 그림이 있다. 산과 나무 그리고 한 채의 집이.. 더보기
양천팔경(陽川八景) '양천사람은 바람 마시고 죽을 마신다’, ‘양천 원님 부임할 때 울고 나갈 때 운다.’ 양천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한강 강변 마을이라 안정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면적은 얼마되지 않고 넓은 침수지대의 목초가 무성한 벌판이 있는 곳이 있다. 강변의 벌판은 바람이 세고 농사를 지어도 침수로 인하여 흉년이 들 때가 많아 이런 속담이 나왔다고 한다. 양천은 아름다운 경치에 도성과 가깝기 때문에 명사들과 교류하기가 쉬운 곳이기도 했다. 궁산은 양천향교 뒤에 위치한 얕은(해발 74.3M) 산이다. 파산 성산 관산, 진산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조선시대까지 양천(현)은 지금의 서울 강서구와 양천구를 모두 관할하는 곳이었다. 현재 양천(현) 관아터 양천향교 그리고 양천(현)의 진산이었던 궁산과 궁산 정상에 축.. 더보기
양천과 한강 행호 그리고 웅어 서울의 강 경강은 마포 망원동-난지도를 지나면서 행호(杏湖)로 그 이름이 바뀌어 불린다. 한강물은 용산에서 서북쪽으로 꺾여 양천 앞에 이르면 맞은편의 수색, 화전 등 저지대를 만나 강폭이 갑자기 넓어진다. 안양천과 불광천이 강 양쪽에서 물머리를 들이미는 곳부터 서호 또는 동정호 등으로 불렀다. 창릉천(昌陵川)이 덕양산(德陽山) 산자락을 휘감아 돌며 한강으로 합류하는 행주(杏州) 앞에 이르러서는 그 폭이 더욱 넓어진다. 이 곳을 행호라고 한다. 지금의 행주산성 앞을 가리킨다. 서울 강서구 가양동에 있는 궁산은 절경으로 꼽힌다. 옛 양천고을의 진산으로 이곳에서 바라보는 한강변 풍광은 시정을 불러일으키는 명승이었다. 아울러 이곳 현감으로 왔던 겸재 정선은 그 풍광을 진경산수로 읊고 사천 이병연은 진경시를 지어.. 더보기
조선시대 가장 긴 다리 살곶이 다리 살곶이다리는 조선시대에 강원도와 경상도 지방에서 도성인 한양으로 들어오는 아주 중요한 관문이다. 이 다리는 서울특별시 성동구 행당동 58번지에 있고 사적 제 160호로 지정되었다. 세종 때 왕의 행차가 빈번하여 다리를 놓는 것이 시급함을 느끼게 되었다. 세종 2년(1420) 5월 영의정 유정현과 공조판서 박자청에게 공사를 명하여 공사가 시작된다. 상왕인 태종의 명으로 다리의 공사가 시작된 것이다. 처음에는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당시의 토목 기술 자재 공급이 쉬운 일이 아닌데다가 삼복 더위에 장마가 오기 전에 완성해야 한다는 계절 탓도 있어서 공사를 추진하는데 여러가지 어려움이 따랐다. “예로부터 백성들을 동원하는 데는 때를 맞추라고 하였는데 하물며 장마전에 끝낼 수 있겠는가. 중단하여 가을을 기다리.. 더보기
효녀 '중랑'을 한내에서 만난다. 서울의 중랑천이다. 옛날 중랑천은 도봉동 부근에서는 서원천 상계동 부근에서는 ‘한강의 새끼 강’ 이라는 뜻으로 ‘샛강‘이라고 불리웠다. 한강의 위쪽에 흐르는 냇물이라는 뜻으로 “한천, 한내”라고도 했다. 최욱래 한양대 교수(국문학)가 전하는 중랑천의 전설이다.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조성할 때이다. 능역에 백성들의 동원령이 떨어졌다. 근처 면목동에 사는 병든 노인도 동원령을 받았다. 그 노인에게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버지 제가 대신 능역에 나가겠어요.” 나이 어린 딸 ‘중랑‘이 자청하고 나섰다. 그 중랑은 남장으로 낮에는 능역에 참여하하였다. 그는 낮에는 능역에 일을 하였고 밤에는 아버지는 병간호를 하며 정성껏 모셨다. 공사가 끝날 무렵 중랑이는 최우수 일꾼으로 선발되어 표창을 받게 되었다. .. 더보기
가장 이른시기에 문명이 싹튼 중랑천. 아차산 보루터에서는 서울을 감싸고 도는 한강과 중랑천이 한 눈에 들어온다. 한내 중랑천 주변 너른 들판는 아주 이른시기에 서울의 문명이 싹튼 곳이다. 한북정맥으로 이어온 망우산 봉화산과 아차산이 한양의 외청룡으로 서울의 동쪽을 병풍처럼 지켜주며 자양동 한강 앞에서 멈춘다. 그 산 기슭에는 한내 중랑천이 흐르고 있다. 가장 이른시기 구석기시기의 문명이 거기에 있었다. 망우산을 중심으로 삼각점이 되는 봉화산과 용마산 지역에 구석기·청동기 시대의 각종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은 경희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조사된 서울시 유일의 구석기시대 유적이다. 면목동 구석기 유적은 한강 서울 유역에서 발견된 유일한 구석기 유적이다. 중랑구 면목동의 아차산 서쪽 사면 끝 기슭 면목고등학교 인근의 산기슭에 .. 더보기
용당산의 전설 광나루에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용당산(龍堂山) 전설이다.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한강에는 하늘로 승천하기를 기다리며 하천의 상하류와 주변의 산들을 다스리는 용이 있었다고 한다. 이 용은 한강이 세게 굽어지며 또한 넓어져 사람들의 수상교통이 왕래하던 곳, 광나루 부근에 은거하며 위로는 한강이 시작되는 강원도 태백산 줄기와 아래로는 서해바다를 다스리며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또한 이런 용의 보살핌으로 광나루 주변은 강에서의 어업과 주변의 농업 그리고 강원도로부터 수로를 따라 번창하던 임업에 종사하던 많은 사람들은 넘치지는 않지만 부족하지 않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한강에 은거하던 용은 이제 하늘로 승천하게 되었다. 용은 그동안 자신이 보살피던 많은 미물과 고하였다. 그렇게 기.. 더보기
양녕대군 한양을 떠나다. 아차산 기슭 한강 변에는 광나루가 있었다. 광진은 예전에는 이곳에 버드나무가 많은 나루라하여 양진(楊津)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강원도 일대에서 벌목하여 뗏목을 만들어 한강으로 내려보내는데 최종 도착지가 광나루였다. 또한 서울에서 경기도 광주로 가는데 가장 빠른 나루이기도 하다. 또한 아차산 기슭과 강안에 펼 쳐진 풍경이 아름다워 시인과 묵객들이 찾아와 흥을 돋구던 곳이기도 하였다. 광나루는 세종대왕의 형으로서 세자의 지위를 벗어 던진 양녕대군이 그의 아버지 태종으로부터 내침을 받아 광주로 가던 별리의 아픔이 쌓여진 장소이다. 태종 18년 (1418) 6월 양녕대군은 폐위당하게 된다. 원세자 양녕대군을 외방으로 내보내는 일이 추진되었다. 유정현 등과 같은 신하들은 춘천으로 추방하자고 하였다. 태종은 처음에.. 더보기
독도 뚝섬 한강에 뚝섬 독도(纛島)가 있다. 이 지명은 조선시대 태조 때로부터 유래된다. 한양 도성 동쪽 들녘 동교(東郊)에 뚝섬은 있었다. 이 일대는 실제로 섬은 아니다. 동쪽에서 흘러오는 한강이 뚝섬 지역을 둘러 서쪽으로 흐르고 북쪽에서 흐르는 중랑천은 한강 본류와 뚝섬 서쪽에서 만나게 된다. 한강과 중랑천으로 둘러싸인 섬 같다 하여 뚝섬이라 불리었다. 둑신사(纛神祠)라는 사당이 거기에 있었다고 전한다. 그 둑(纛)을 따와서 그 지역을 뚝섬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한강에 있는 '뚝섬'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둑신사'가 있던 곳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충무공은 이 '둑신사'에서 상강과 경칩에 치우천왕에 제사를 드렸다는 기록이 전한다. 둑신사의 벽에 치우천왕의 탁록대전을 소재로한 대형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는 .. 더보기
경강 첫 나루 광나루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가 겸재 정선(鄭敾 : 1676∼1759)의 그림 「광진(廣津)」이다 . 아차산은 한양과 경기도 광주를 연결하는 나루인 광진(廣津) 즉 광나루는 아차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나루라면 사람들로 붐볐을 법하건만 그림 속의 광나루는 비현실적으로 평온할 뿐이다. 그림 속 아차산 기슭의 집들을 사대부들의 별장들로 보았다. 한강 남쪽 나루의 이름 광나루를 말한다.예전에는 나루 부근에 넓은 모래밭이 펼쳐져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유원지로도 이용되었던 곳이다. 부근에는 버드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었던 곳이다. 광나루 주변은 채소류, 과일류의 산지였다. 예부터 충주를 거쳐 동래로 또는 원주를 거쳐 동해안으로 빠지는 요충지로 유명한 나루터였다. 오래전엔 의정부 동두천 쪽에서 광주 여주 충주 원주로 가려면..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