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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탐방 에세이

조선시대 가장 긴 다리 살곶이 다리

살곶이다리는 조선시대에 강원도와 경상도 지방에서 도성인 한양으로 들어오는 아주 중요한 관문이다.
이 다리는 서울특별시 성동구 행당동 58번지에 있고 사적 제 160호로 지정되었다.
세종 때 왕의 행차가 빈번하여 다리를 놓는 것이 시급함을 느끼게 되었다.
세종 2년(1420) 5월 영의정 유정현과 공조판서 박자청에게 공사를 명하여 공사가 시작된다.
상왕인 태종의 명으로 다리의 공사가 시작된 것이다. 처음에는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당시의 토목 기술 자재 공급이 쉬운 일이 아닌데다가 삼복 더위에 장마가 오기 전에
완성해야 한다는 계절 탓도 있어서 공사를 추진하는데 여러가지 어려움이 따랐다.
“예로부터 백성들을 동원하는 데는 때를 맞추라고 하였는데 하물며 장마전에 끝낼 수 있겠는가.
중단하여 가을을 기다리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당시 세종의 어명으로 공사는 착수한지 20여일 만에 기초 부분만 완성된 채 중단된다.
성종 6년(1475) 다리를 가설하도록 명하여 성종 14년(1483)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열악한 시공조건으로 인해 미완성으로 방치되다가 성종 14년(1483)에 완공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다리는 동대문과 광희문(일명 수구문)을 나와 이 다리를 건너면 광나루로 빠져 강원도로 송파로 건너 충주로 나가는 통로였다.
여기서 남쪽으로 가서 배를 타면 또한 태종과 순조의 능인 헌릉 인릉으로 가는 길이다.
삼성동에 성종과 중종이 모셔진 선릉·정릉에 이르게 되어 국왕이 수시로 참배하는 길이다.
또 봉은사로도 통하게 되어있다. 주변의 기름진 벌판인 뚝섬은 조선 초기부터
나라의 말을 기르는 목장과 군대의 열무장(閱武場)이 있어 임금이 때때로 군사훈련을 참관하기 위해 이 다리를 건넜다고 한다.
대한제국의 순종황제의 국장 행렬이 금곡 유릉으로 향할 때에 이 다리를 건너기도 하였다.
1913년 일본인들은 다리 윗면을 콘크리트로 보수 하였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때 다리 일부가 물에 떠내려간 채 방치되었다.
그 후 1938년 5월에 이 다리 옆에 성동교가 가설되자
이 다리는 방치된 채 최근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1972년에 서울시가 무너진 다리를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하천의 폭이 원래보다 넓어져 있었기 때문에 다리 동쪽에 27m 정도의 콘크리트 교량을 잇대어
증설함으로써 원래의 모양과는 다소 차이가 나게 되었다.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다리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다리다.

대청마루를 깔듯 세 줄의 판석을 빈틈없이 깔았으며, 실측한 결과 폭이 6m, 길이는 76m의 다리였다.조선조 고종 때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살곶이다리의 일부를 가져다가 석재로 썼다고 하지만 확인할 수는 없다.
이 다리는 난간이 없는 단순한 구조로 장대하지만 따뜻한 질감이 느껴진다.
특이한 점은 다리의 안정을 위해 가운데 두 줄의 교각을 바깥보다 15∼40cm 가량 낮게 하여 중량을 안쪽으로 모았다.
50여년 전만 해도 어두어지면 이 다리 밑에서 노상강도가 나타났으므로 행인들이 무서워 밤을 지낸 후에야 건너 다녔다지만
지금은 정비된 중랑천 둔치와 함께 시민들의 산책로로 이용되고 있다.

살곶이다리는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장석판교(長石板橋) 중 가장 큰 규모의 다리로서,
가로로 놓인 기둥이 4열, 세로로 16열에 모두 64개의 돌기둥으로 만들어졌다.
다리 높이는 강 표면으로부터 3m 내외이며, 기둥의 높이는 1.2m 가량이다.
좌우의 다리 끝은 장대석(長臺石)으로 쌓고 네모난 돌기둥 교각 16개소를 세웠다.
좌우의 다리 끝에 돌난간은 없다. 모두 64개의 돌기둥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다리 하부의 교각은 높이 약1.2m의 기둥을 네 줄로 세운 위에 받침돌을 놓고
그 위에 마루처럼 판석을 세 줄로 덮어 깔았다.
기둥돌 아래는 네모난 주초(柱礎)가 있고 그것은 물밑 받침돌에 의하여 지탱되도록 하였다.

다리 형태가 가로, 세로로 곡면을 이루어 잘 조화되어 있고 면밀하게 구축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교각의 간격은 대략 3~4m 정도이며, 돌기둥 위를 3장의 장대석을 건너지른 다음 그 위에
다시 귀틀돌을 놓아 청판돌을 받게 한 구조다. 각 부의 석재가 장대하고 수수하여 호쾌한 느낌을 준다.
다리 아래에서 보면 돌기둥과 장대석, 귀틀돌들이 마치 씨름꾼의 몸과같이 힘이 넘치는 느낌을 준다.
다리의 안정을 위해 교각 중에서 가운데 두 줄의 교각을 바깥보다 15∼40cm 가량 낮게 하여
다리의 중량을 안쪽으로 모이게 하였다. 또한 돌기둥은 흐르는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마름모형으로 만들어졌으며,
돌 기둥에 무수한 흠집을 새겨놓아 물살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하였다.
기둥돌 아래에는 받침돌이 네모난 주춧돌을 지탱하고 있으며, 주춧돌 사이에는 포석을 깔아 기초를 단단히 하였다.
따라서 물이 줄 때는 이 포석 면이 드러나 마치 지금의 잠수교와 같아 ‘이층다리’ 라고도 불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