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강 탐방 에세이

양녕대군 한양을 떠나다.

아차산 기슭 한강 변에는 광나루가 있었다.
광진은 예전에는 이곳에 버드나무가 많은 나루라하여 양진(楊津)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강원도 일대에서 벌목하여 뗏목을 만들어 한강으로 내려보내는데 최종 도착지가 광나루였다.
또한 서울에서 경기도 광주로 가는데 가장 빠른 나루이기도 하다.
또한 아차산 기슭과 강안에 펼 쳐진 풍경이 아름다워 시인과 묵객들이 찾아와 흥을 돋구던 곳이기도 하였다. 광나루는 세종대왕의 형으로서 세자의 지위를 벗어 던진 양녕대군이
그의 아버지 태종으로부터 내침을 받아 광주로 가던 별리의 아픔이 쌓여진 장소이다.
태종 18년 (1418) 6월 양녕대군은 폐위당하게 된다.
원세자 양녕대군을 외방으로 내보내는 일이 추진되었다.
유정현 등과 같은 신하들은 춘천으로 추방하자고 하였다.
태종은 처음에 이를 응낙하였으나 곧 가까운 광주(廣州)로 바꾸어 나가게 하였다.

양녕대군이 떠나는 날
양녕대군은 동대문 밖까지 그를 수행하던 원윤(元胤)에게
"경은 무슨 일로 나를 따라 오는가?" 고 물었다.
원 윤은,
"호송하라는 분부이시옵니다." 하니,
양녕대군은,
"앞으로는 이 땅을 두번 다시 볼 수 없겠구나!" 하고
광나루에서 배를 타며 눈물을 지었다.
작별할 때 원윤에게 말하길,
"…죄가 큰데도 죽지 않은 것은 오직 나라님의 덕택이다.
무엇으로 이 은혜를 보답할는지…
이처럼 불효하였으니 장차 무슨 낯으로
나라님을 뵈옵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 하였다.
호송을 하던 원윤은 양녕대군의 일행 가운데
여자의 숫자가 나라에서 정해 준 인원보다도 많다고 하여
두 사람의 여자를 빼앗아 돌아왔다.
이 보고를 들은 태종은,
"그 두 여자도 다 양녕의 첩이다.
 빼앗아 온 것은 경의 잘못이다." 하고,
곧 광나루로 되돌려 보내주도록 명하였다.

나루는 강을 건너기 위한 장소다.
나루는 강의  폭이 크고 작음에 따라 여러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 가운데서 도와 진이 가장 많이 쓰였다.
광나루는 삼밭나루 한강나루 노들나루 양화나루 등과 함께
한강의 5대 나루로 손꼽혀 일찍부터 각종 물품과 사람들의 집합장소로 유명했다.

 

 

'한강 탐방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장 이른시기에 문명이 싹튼 중랑천.  (0) 2012.04.30
용당산의 전설  (0) 2012.04.29
독도 뚝섬  (0) 2012.04.24
경강 첫 나루 광나루  (0) 2012.04.24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0) 2012.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