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강 탐방 에세이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아차산성은 1973년도에 우리 나라 사적 제 234호로 지정이 되었다.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과 구의동에 걸쳐져 있고, 삼국시대 때의 산성이라고 한다.
아차산성은 아단성, 장한성, 광장성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아차산성은 삼국시대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갖고 있지는 않다.
아차산의 중턱 위쪽 약 1000m 이상의 길이의 성벽으로 두른다고 한다.
동쪽, 남쪽, 서쪽에는 성문도 남아 있다고 한다.
성문을 찾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그래도 남아있는 산성을 아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아차산성은 백제가 세우고 고구려가 빼앗았다가 신라가 최종 점령한 곳이다.
590년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이자 평강공주의 남편이었던 온달장군이 성을 수복하고자 싸우다 이곳에서 전사한다.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인 온달(溫達·?~590)장군이 죽령 이북의 잃어버린 땅을 찾기 위해
신라군과 싸우다가 이 성 아래에서 죽었다는 전설이다. 삼국사기 ‘온달전’을 보면 온달은
신라에 빼앗긴 남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590년(영양왕 1)에 천릿길을 달려왔다.             
온달은 “계립령과 죽령 서쪽 땅을 되찾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않겠다”며
비장한 출사표를 던졌지만 안타깝게도 아단성(阿旦城)에서 신라군과 싸우다 화살에 맞아 죽고 만다.
아단성은 어디일까. 삼국사기의 아단성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다.
서울의 아차산성으로 보는 견해와 단양의 온달산성으로 보는 견해로 나뉘고 있다.

온달 장군이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 건너온 왕족의 아들일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  최근 학계에서 제기돼 흥미롭다.
“온달 장군은  서역인과 고구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다문화가정의 자녀로,
고구려 장군의 지위에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연세대 지배선 교수는  논문 ‘사마르칸트와 고구려 관계에 대하여’에서 온달을 설명한다.
사마르칸트는 당시 ‘강국(康國)’이라 불리던 큰 나라였다.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한 농업학자들이 촬영한 '한국-우즈벡우호공원'이다.
그 공원에는 바보온달과 평강공주를 상징하는 장승들이 서 있었다.
강국(康國)은 13세기 몽골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실크로드에 자리잡은 동서교역의 요충지였다.
중앙아시아와 고구려 유민사를 연구하는 지 교수가 주목한 것은 온달과 관련된 각종 고서의 기록이다.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 지역은 당시 ‘강국(康國)’이라 불렸던 큰 나라였습니다.
강국은 13세기 몽골제국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실크로드 대상길에 자리잡고 있어 교역 무대였죠.
이 지역은 아시아 대륙의 중앙에 위치해 사방으로 길이 열려 있고 주변이 평탄해 이동이 유리했던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강국 사람들이 외국으로 교역을 나갈 때는 상인뿐 아니라 자체 호위무사, 책임자 등이 한 집단이 되어, 그 규모가 적게는 수백 명부터 많게는 수천 명에 달했습니다.
동서문명의 교통 루트가된 실크로드를 개척하는 데 강국 사람들이 선봉 역할을 한 것입니다.”
지 교수는 “이같은 지정학적 요인은 비즈니스를 강조했던 강국의 문화와 어울려 당시 고구려와의 국제 교류를 활발하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며 ‘통전(通典) 권(卷) 193 변방(邊防) 강거전(康居傳)’에 인용된 위절(韋節)의 ‘서번기(西蕃記)’ 기록을 근거로 제시했다.
이 기록엔 당시 강국과 강국 사람들에 대해 “강국인은 모두 장사를 잘하며, 사내아이가 5세가 되면 문자를 익혔고, 장사를 가르쳐 이익을 많이 내는 것을 최고로 여겼다”고 돼 있다.
지 교수는 “당시 상황으로 볼 때, 강국 사람들이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머나먼 고구려로 가는 것은 그렇게 큰일이 아니었다”며 “온달의 아버지도 장사를 위해 고구려에 방문한 강국의 상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한강 탐방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도 뚝섬  (0) 2012.04.24
경강 첫 나루 광나루  (0) 2012.04.24
4대의혹사건으로 출발한 쉐라톤워커힐  (0) 2012.04.22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  (0) 2012.04.22
아차~! 산 그 전설  (0) 2012.04.21